예전에만 해도 엄마 세대 이상의 사람들만 들 것 같은 구찌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트렌디하게 변하며 젊은 층들도 사랑하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이제 구찌는 남녀노소를 떠나 모두가 좋아하는 브랜드인 것 같습니다. 한때는 잠깐 외면을 받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던 브랜드 구찌입니다. 오늘은 지금의 구찌를 있게끔 만들어준 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목차
- 벨보이가 세계적인 브랜드를 설립하기까지
- 구찌의 시그니처 아이콘의 탄생
- 그가 남기고 간 유산
벨보이가 세계적인 브랜드를 설립하기까지
구찌오 구찌는 1881년 3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 피렌체는 본래 가죽으로 굉장히 유명한 곳으로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구찌오 구찌는 자연스럽게 가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구찌오 구찌의 이력은 독특합니다. 1898년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간 구찌오 구찌는 호텔의 벨보이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계기가 패션디자이너로 전향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호텔 벨보이로 일을 하면서 매일같이 상류층 고객들의 가방과 트렁크를 옮기게 되는데 이때 옮기던 가방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가방들은 가죽 제품이었고 상류층이 애용하는 제품들을 살피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취향 파악과 안목을 높이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구찌오 구찌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가죽 공예 기술을 습득하고 당시 승마가 인기였기에 마구상을 오픈해 이곳에서 가죽 제품들을 함께 판매하게 됩니다. 장인정신을 깃들여 만든 구찌오 구찌의 제품들은 금세 입소문을 타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후 그는 상류층이 선호하는 디자인의 가방들을 만들면서 가방 가게를 오픈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찌의 시작이 됩니다.
구찌의 시그니처 아이콘의 탄생
상류층을 적극 공략하면서 인기를 얻었던 구찌는 1938년 로마로 가게를 확장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구찌는 이탈리아 국내에서만 유명했지 세계적인 브랜드는 아니었으나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전세계적인 브랜드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바로 구찌의 시그니처 뱀부백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다수의 브랜드들이 원자재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구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죽 공급에 어려움을 겪던 구찌는 손잡이 부분을 대나무로 만들면서 독특한 디자인을 가진 뱀부백을 선보였습니다.. 구찌의 뱀부백은 출시 즉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단숨에 세계적인 브랜드로 등극합니다. 또한, 구찌의 대표 아이콘 홀스빗 장식은 과거 마구상을 운영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는데 안장 끈을 변형시켜 만든 장식입니다.
그가 남기고 간 유산
구찌오 구찌는 1953년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가족이 계속해서 브랜드를 승계하며 브랜드를 확장해 나갑니다.. 유럽 중심으로 매장이 형성되어 있던 구찌였으나 미국, 홍콩, 일본 등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합니다. 이 시기에 현재 구찌의 대표 로고인 GG 로고도 만들어집니다. 구찌 로고가 구찌오 구찌가 떠난 후 만들어졌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구찌는 예전부터 여러 유명인들이 즐겨 찾던 브랜드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찌의 재키백은 처음부터 해당 품명으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해당 백을 즐겨 드는 모습을 보이면서 재키백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재클린 케네디 외에도 그레이스 켈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사랑한 구찌였습니다.
사실 구찌오 구찌가 세상을 떠난 후, 구찌의 뒷이야기는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재산과 상속 문제 등으로 그의 아들들이 치열하게 다툼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족 내 분열은 브랜드 경영에까지 이어졌고 브랜드 역시 추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로 새로 임명된 톰포드로 인해 구찌를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와 함께 화려한 부활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구찌는 여러 굴곡이 많았던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굴곡으로 인해 더욱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들을 만들었고 그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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